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카티 피펜 (문단 편집) === 불스를 떠난 후 === 1997-98시즌이 종료되고 피펜은 사인 앤 트레이드 방식을 통해서 [[휴스턴 로케츠]]로 이적하게 된다. 계약조건은 5년간 6천7백만 달러. 드디어 원하던 천만달러의 사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팀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은퇴했지만, [[하킴 올라주원]]이나 [[찰스 바클리]]가 건재했고, 여기에 피펜이 왔으니 이 멤버면 우승못하는게 이상한 정도의 사기 라인업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네임밸류만 보면 그런거지 실질적으론 빛 좋은 개살구에 가까웠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먼저 이들의 조합은 좋지 않았다. 하킴과 바클리의 공격범위가 빅맨치곤 넓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로우포스트 기반 빅맨들이었다. 안 그래도 이들의 활동반경이 겹치는데 심지어 이들은 수비범위도 당시 기준으로 그렇게 넓지 않았다(바클리는 원래 수비범위가 좁고 올라주원은 역대 최고의 수비수중 하나였지만 만 36세의 느린 발로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수비에서 바클리의 구멍은 피펜이 메워줄 수 있긴 했다. 문제는 공격, 피펜은 슛을 안정적으로 넣어주는 선수가 아니다. 결국 포스트업이나 돌파로 해야되는데 로우포스트에 둘이 버티는 팀에서 피펜은 조던 옆에 있을때보다 더한 (공격 한정) 들러리가 되어야했다. 게다가 샘 카셀의 이적 이후 고질적인 문제가 된 포인트 가드 문제를 결국 해결하지 못해 슈팅 가드 두 명을 주전가드로 세워야했을 정도였다. 피펜이 트라이앵글 하에서 포인트 가드 역할을 했지만, 애초에 PG의 리딩력이 거의 필요없는 트라이앵글 오펜스와 포스트맨 두명을 위주로 짜여진 휴스턴은 천지차이였다. 게다가 피펜은 뛰어난 빅맨공격수와 뛰어본 적이 없는 선수여서 게임리딩으로 둘을 살려주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시너지는 커녕 1+1=2가 되기도 힘든 라인업. 두번째로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늙었다'''는 점이었다. 올라주원은 써드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의 그 드림이 아니었다. 34세가 가까워지던 피펜은 득점원으로선 올스타급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 되어갔다. 바클리는 골밑득점과 리바운드(12.3개)에선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갈수록 저질이 되어가는 수비, 떨어지는 기동력으로 더 이상 엘리트 선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그 시즌은 단축 시즌으로 팀당 50경기밖에 치르지 않았음에도 10경기나 결장할 정도로 부상이 잦았다. 게다가 30대 중반의 늙은 골밑은 기동력이 심하게 떨어졌고, 각각 평균 10득점 정도 넣던 마이클 디커슨이나 쿠티노 모블리의 득점력에만 의존해 속공 득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즉, 같이 뛰면 시너지가 안 나는 선수들끼리 모였다는 점과 네임밸류에 비해 노장들이라 실제 실력이 훨씬 떨어졌다는 점 때문에 애초에 그렇게까지 대단한 라인업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딱 5할이었던 전 시즌에 비해 6할까지 성적이 올랐으니 마냥 못했다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해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에게 1승 3패로 탈락. 피펜은 비난의 화살을 찰스 바클리에게 돌렸다. "그는 열심히 뛰지 않는다. 그는 정말로 우승할 마음이 있었는가? 조던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바클리 때문에 졌다."라고 하였다.[* ESPN Sports Century에서 바클리가 한 말에 따르면 인터뷰 직후 조던이 전화해 "그런말 한적 없어. 스카티가 한 말은 bs(bullshit:x소리)야"라고 했다고 한다. 진실이야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조던이 사적으로는 그리 친하지도 않은 피펜에게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는 바클리를 욕했을까? 조던과 바클리는 바클리가 조던의 구단 운영에 대한 소신발언을 하기 전까지는 친하게 지냈지만 피펜과는 둘다 사적인 교류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조던이 99년 은퇴 기자회견을 할 당시 은퇴 전 패트릭 유잉, 찰스 바클리와 의논했다는 점을 밝히면서 "찰스 바클리한테 넌 평생 우승 못할거라고 했죠. 팀을 위한 헌신이 부족하니까"라고 언급한 것을 집은 것이다. 그런데 이 멘트는 조던이 늘상 바클리에게 하는 장난스런 디스였고, 실제로 기자회견 장에서도 웃으며 한 농담에 불과했다. (조던은 05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바클리와 동반 출연했을때도 비슷한 디스를 한 적이 있다) 즉 친한 친구끼리 트래쉬토킹이었지, 진지하게 폄훼를 한 멘트가 아니었음에도 이를 이용해 바클리를 폄훼하는데 쓴 것이다.] 피펜이 저런 투정을 할만도 했던 것이 바클리는 나이가 들면서 운동능력과 기동력이 점점 떨어졌음에도 체중부터 시작해 몸관리에 소홀했다. 오프시즌 때면 공을 손에서 놓고 놀기로 유명했는데 젊은 시절에는 충만한 재능으로 커버가 됐지만, 관리가 필요한 말년에 와서도 몸만들기에 힘을 쏟지 않았다. 툭하면 부상으로 결장할 정도로 시즌 내내 몸상태가 안좋았는데, 본인은 물론이고 말년에도 몸관리에 철저했던 조던을 봐왔던 피펜 입장에서는 바클리가 못마땅해 보이는게 당연지사. 실제로 바클리와 피펜은 사이가 매우 안 좋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정작 바클리는 휴스턴을 떠나서 은퇴를 하려다 피펜과 계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펜이 온다면야"하면서 연봉 150만 달러의 헐값에 휴스턴과의 계약을 갱신했다. 특히 바클리는 "나에게 피펜같은 동료가 있었다면 조던이 가지고 있는 트로피중 절반은 내것이었을 것이다." 라는 발언까지 하며 피펜을 선수로서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존중해줬었다. 바클리가 우승에 얼마나 목이 말라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바클리 입장에서는 자발적인 페이컷까지 해가며 피펜과 팀이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왔고, 실제로 피펜은 합류 초기에 이에 대해 고마워했는데 1년만에 런을 하려는 꼴이니 빡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게 시발점이 되어 둘의 관계는 험악해졌고, 결국 휴스턴은 그를 다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시켰다. 당시 피펜의 네임드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그의 샐러리를 맞추기 위해 포틀랜드는 무려 여섯명의 선수를 휴스턴에 퍼줬다.[* 다만 6명의 선수 중 휴스턴에서 터진 선수는 아무도 없다.][* 트래이드 당시 바클리는 "피펜은 휴스턴과 팀, 그리고 (연봉을 포기한) 나한테 사과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트래이드 직후 피펜은 "그 한심하고 뚱뚱한 엉덩이 (sorry fat butt) 옆에서 뛰게했으니 그 (바클리)가 사과해야한다"며 자신은 총을 들이밀어도 (at gunpoint) 사과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바클리가 기자들에게 한 멘트가 압권인데, "글쎄 난 항상 총을 갖고 다니거든요. 제가 만약 살인으로 체포되면 '그 녀석이 사과 안 했구나' 하세요."라고 농담했다.] 당시 포틀랜드는 명문팀으로 가기 위해 아낌없이 현질중이었다. 포틀랜드의 구단주가 바로 빌 게이츠의 동업자이자 친구인 [[폴 앨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멤버가 라쉬드 월라스, 스티브 스미스, 브라리언 그랜트,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아르비다스 사보니스, 데틀레프 슈램프, 본지 웰스, 저메인 오닐 등등의 후덜덜한 라인업이었다. 여기에 피펜까지 가세했으니 포틀랜드는 단숨에 우승을 노릴 수 있는 팀으로 거듭났다. 비록 피펜은 나이와 부상 덕택에 기량은 다소 저하되었으나 그 특유의 센스와 강력한 수비력은 변함없었다. 정규시즌에서 무려 59승을 거두며 2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레이커스와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최종 7차전에서 믿기지 않는 역전패를 당하며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재미있었던 것은 바로 이 당시 상대팀 감독이 그와 고락을 함께 했던 필 잭슨이었다는 점이다. 피펜은 후에 이때가 자신의 농구경력에서 제일 아쉬운 한해였다고.[* 아무래도 시카고 시절에는 조던의 사이드킥이었기 때문에 자신만의 가치를 인정받기가 힘들었고, 때문에 피펜은 신진강호의 기둥으로 활약해서 팀을 정상으로 이끌어 자신만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시기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당시 레이커스를 상대로 1승 3패로 뒤진 상황에서 5, 6차전을 잇달아 잡아내 동률을 만들었고, 최종 7차전 또한 4쿼터 한때 15점차의 리드로 파이널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정말 귀신에 홀린듯한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으니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을 듯.] 적이 별로 없다는 생각 탓인지 시카고 불스를 떠난 이후로 그후 그는 수 년간 포틀랜드의 정신적 지주로써 활약했지만, 시카고 불스만한 포스가 없었다. 더군다나 포틀랜드가 Jail Blazers[* 당시 포틀랜드는 워낙 주축선수들이 막장짓을 해대는 바람에 홈관중들마저도 팀을 외면하는 상태였다. 보이콧 움직임까지 보였다.]라는 조롱과 비판을 받았을때, 팀을 바로 잡아주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피펜의 실력은 누구도 부인못하는 레전드이지만 리더쉽이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냐고 하면 아무래도 대답이 궁해진다. 스티브 커가 증언했듯 불스 시절 피펜은 다들 좋아하는 따뜻한 리더였지만 위기의 순간에 팀을 강하게 장악하며 동료들을 끌고 간 적은 없다. 93-94시즌은 불스 왕조를 겪으며 완성된 선수들의 기량과 팀웍, 공동주장인 빌 카트라이트와 베테랑 존 팩슨 등이 있었기에 피펜은 조던 옆에서 하던 것처럼 농구만 잘하면 되는 환경이라 훌륭한 기량을 보였지만, 팀이 위기에 처한 첫 무대인 닉스 시리즈에선 위에 나온 것처럼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94-95시즌의 경우 불스의 팀케미는 그야말로 콩가루였다. 99-00시즌 블레이저스의 리더로 유명하지만 포틀랜드는 전 시즌에 승률 70%로 디비전 1위를 차지한 강팀이었고, 이는 82경기로 환산할시 57승으로 00시즌 59승과 별 차이가 없으며 플레이오프 성적도 둘 다 서부 결승 탈락이다.(물론 피펜의 합류가 의미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분명 00년 블레이저스는 99년보다 확실히 강했지만 그 차이가 우승후보팀이 우승팀으로 스텝업할 정도로 크진 않았단 의미) 블레이저스는 전형적인 win-now팀으로 베테랑들이 많은 팀이었는데도 피펜이 별다른 리더쉽을 보여주거나 성과를 보인 적도 없으며 오히려 00년 7차전 4쿼터 단체부진에 일조했다. 즉 '에이스 피펜'의 성과는 딱히 특출나지 않으며 리더쉽 측면에서도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그의 뛰어난 실력에도 불과하고 1옵션, 혹은 에이스로서는 그리 높이 평가받지 않는 이유.] 포틀랜드에서 다사다난한 4년의 시간을 보낸후 피펜은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한 시카고 불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